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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세상 따위 멸망해도
지은이 남유하
출판사 사계절
『세상 따위 멸망해도』는 「푸른 머리카락」으로 한낙원과학소설상을 받은 남유하 작가가 처음 내놓는 청소년소설집이다. SF와 판타지, 호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곱 편의 단편에는 사랑과 죽음이 나란히 담겨 있다.

표제작 「세상 따위 멸망해도」는 멸망 직전의 세계라는 거대한 상상을, 편의점 탁자 위의 아주 작고 구체적인 장면들로 채운 사뭇 사랑스러운 단편이다.
12월 31일 토요일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위화감을 느낀다. 집 안에 언니가 없고, 옆집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어젯밤 잠들기 전, 세상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게 해 달라고 빌었던 게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텅 빈 주차장에서 누군가 올려다보고 있다. 2년 반 전에 헤어진 구남친 ‘재이’다. 둘은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 나란히 앉아 삼각김밥과 바나나 우유를 먹으며, 사귀던 시절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컵라면 물이 불 때까지 3분 동안 추던 춤, 함께 듣던 노래, 엉뚱한 농담, 서로에게 주었던 위로를 상기한다.
그러다 재이가 함께 읽은 소설 속 ‘원숭이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고백한다. 실은 “너랑 둘만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었다고. 소설에서 원숭이 손은 언제나 소원을 기묘한 방식으로 들어주어서, 결국 등장인물들이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제야 모든 것이 조금씩 비틀린 편의점 풍경, 편의점을 조금만 벗어나도 폐허뿐인 세상을 자각한다. 사뭇 달콤했던 분위기는 그를 기점으로 달라진다. 둘이 헤어진 것은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다. 가족에게 폭력을 당하는 나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재이가 불행을 공유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원숭이 손에게 빌 수 있는 소원은 이제 딱 하나.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이대로 여기 남을 것인가?
결정에 앞서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묻지만 쉽게 답을 내지 못한다. 독자들도 잘 알다시피, 돌아갈 세계는 여전히 살기 힘든 곳일 테고 사랑은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 놓는 마법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련 따위 없는 줄 알았던 그 현실에 ‘세상에 너랑 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빌어 줄 사람이 있다면, 한번 돌아가 볼 만하지 않을까? 서로의 불행을 외면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마주 앉은 그 하루는, 어떤 세계에서든 살아남을 이유가 되기에 충분하다.